________개 시 곡________

        만남의 자리, 나눔의 자리 "우리 사는 세상"입니다. 안녕하십니까, ____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 사는 세상"생활수기로 동녕현 이현숙씨의 "볶고 지진 20년 세월"과 연수현 김춘식씨의 "민영교원의 아내"를 전해드리겠습니다.

        방송으로 함께 하는 좋은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_______간    주________

        동포사회 삶의 현장과 정감을 조명하는 "우리 사는 세상"생활수기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먼저 동녕현 이현숙씨의 "볶고 지진 20년 세월"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아들을 바라고 낳다보니 딸만 줄줄이 다섯을 낳은 부모님이었다. 그런 자식들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자 학비랑 책값이랑 대기가 힘에 겨웠다. 하여 아버지는 "가시나들은 공부해도 쓸모가 없다."시면서 초중만 필업하면 학교에서 잡아떼었다. 나도 그런 운명을 면치 못하고 고중 일학년 교실에서 아버지한테 끌려 집으로 와야만 했었다.

 우로 언니들이 있으니 가무도, 들일도 내가 나설 필요가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연해도시나 해외로 나가는 일은 기본상 없었으므로 나는 그냥 집에서 빈둥빈둥 놀았다. 그러는 내가 걱정돼 어머니는 재봉이던 미용이던 손재간을 배우라고 하셨다. 심심하던 차라 나는 집에 있기보다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아 미용을 선택했다.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당시 나이가 18살이었다.

일년간 부지런히 배우고 나니 배울 것이 없어보였다. 이젠 출사해도 되겠다고 여기고 나는 미용도구랑 사들고 귀향했다. 그리고 빨리 돈을 벌어야겠다는 심산으로 서둘러 이발소부터 오픈했다. 이발소라야 창고로 쓰던 한구석을 대충 손질하고 벽 바르고 커다란 거울을 붙여놓고 의자를 가져다놓은 것이 전부였다.

 머리야 자라니 손님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햇내기인 것도 있지만 집이 원래벽한 곳에 자리 잡은 지라 사람들은 그곳에 이발소가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한 달 내내 손님은 고사하고 잘 되냐 문안해주는 사람조차 없었다.

  문을 닫아야 할지 어쩔지 고민하고 있던 어느날, 손님이 찾아왔다. 중년의 남성분이었다. 더우니까 시원하게 쳐달라며 의자에 앉는 것이었다.

손님이 들어와서 흥분한데다가 처음이라 긴장하기까지 하다 보니 손이 바르르 떨리고 있음을 절로도 직감할 수 있었다. 애써 정신을 가다듬고  배운 재간대로 열심히 깎았다. 그런데 귀밑머리를 쳐준다는 것이 아차하는 순간 그만 가위날이 귀끝을 스쳤다. 당황한 김에 손에 들었던 머리빗이 땅에 떨어지고 가위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수건을 가져다 바치며 연신 죄송하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처음인 모양이구만. 괜찮아 실수할 수도 있는 거지."

손님은 손으로 귀끝을 닦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었다이렇게 고마울 수가 있을까! 나는 그분에게 절이라도 꾸뻑 하고 싶었다. 그분은 나의 손님이자 내 이발생애의 은인이기도 하였다. 그분이 그 자리에서 노발대발했더라면 에라 이발소 문을 닫고 그만두었을지도 모른다.

차차 손님들이 가물에 콩 나듯 하나둘씩 찾아왔다. 거개가 철부지애들 아니면 제일 눅거리 파마를 원하는 할머니들이였다.

이때근에 소문이 짜한 미용사가 시가지로 자리를 옮기며 가게를 양도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미장원은 위치가 좋다지만 6평방미터가 되나마나 한 나무로 만든 간이 집으로서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덥고 비오는 날이면 물이 샜다. 뿐만아니라 그때로 말하면 천문학수자나 다름없는 엄청난 값에 내놓았던 것이다

 모두들 비싸다고 주저했지만 나는 선뜻 그 집을 사들였다. 위치도 위치지만 미장원의 단골손님을 노렸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손님들이 빌새 없었다. 미용사가 바뀌었다고 기웃거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들어왔던 김에 머리를 손질하고 갔다. 그사이 나의재간도 많이 늘었고 수입도 괜찮았다. 그런데 하늘의 풍운조화는 누구도 모른다고 한창 나가는 나에게 사망선고나 다름없는 통지가 왔다.

1991, 러시아와접하고 있는 우세를 살려 정부에서는 마을에관을 세웠다. 외지인들과 외국인이 드나든다고 마을면모도 개변하였다. 우선 번화가 양편 올망졸망 들어앉은 간이상가들을 허물어버리라고. 다들 의견이 불같았으나 정부의 명령이라 어쩌는 수가 없었다.

 나는 그간 조금 모인 돈으로 어느 음식점 귀퉁이에 10여 평방미터되는 벽돌집을 지었다. 말이 벽돌집이지 판자집과 다를바 없었다. 역시 겨울에는 너무도 추워 천정에 물이 뚝뚝 떨어지고 여름엔 화기로 숨이 컥컥 막혔다. 이렇게 간고한 환경 속에서도 나는 열심히 고객들의 머리를 지지고 볶고 하면서 나름대로의 인생을 걸어갔다. 그사이 결혼도하고 귀여운 딸애도 낳았다.

 이제 생활이 펴이나 싶은데 그간 우리식구의 6무되는 밭을 열심히 다루어오던 남편이 동네 잔칫집 갔다 오더니 단통 러시야 장사를 떠난단다. 이젠 아내가 번 돈을 쓰지않고 장사 몇 번이면 아내를 호강시켜줄 수있다면서 큰소리 빵빵 쳤다. 그러지 말고 한집식솔 오손도손  살자고 구슬려도 막무가내였다.

그런데 남들은 그렇게 식은죽 먹기로 하는 장사도 남편과는 인연이 없는지 남편은 번번이 빈손으로 돌아왔다. 내가 한푼 두푼 애써 모은 돈을 뭉치채로 들고 가 러시야 땅에 뿌리고 오는 남편을 볼 때마다 이혼하고픈 생각이 굴뚝같았다.

 집에 재산을 거의 탕진하고 난 남편은 끝내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데 포기한 것은 장사뿐이 아니었다. 인생도 함께 포기했다. 매일 어중이떠중이들과 술 마이며 허송세월을 하였다. 시부모들과 친척들이 아무리 욕해도 쓸모가 없었다. 하긴 아내가 피땀으로 번 돈을 전부 탕진했으니 술에 취하지 않으면 아내의 얼굴을 마주볼 수가 있으랴!

지난 2000 정부에서 투자하여 번화가에 6 아파트를 세웠다. 1층에 위치한 상가가 불이 번쩍나게 팔리었다. 위치가 좋으니 무슨 장사를 하나 돈 벌 수가 있으니 말이다. 처음엔 돈이 없어 감히 엄두를 못 내던 나도 오기가 생겼다. 나라고 뭐가 부족하단 말인가!

나는 집에 차례진 6무를 한족에게 30년 동안 양도한다는 계약서를 쓰고 6만원을 손에 쥐였다. 그리고 형제들한테서 6만원을 빌렸다. 11만원을 들여 넘겨치기하는 상가를 사고 만여 원을 들여 장식했다.

매끌매끌한 도자기바닥, 알른알른한 거울, 그리고 뱅글뱅글  돌아가는 회전의자... 실로 꿈만 같았다. 지금까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나에게만 속하는 미용원이었다. 여기서 이제부터 긴 머리 짧은 머리, 남자머리 여자머리 깎아주고 볶아주고 하는 나의 색다른 인생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머리에 대한 남다른 애착심이 세상 사람들을 보다 아름답게 꾸며주려는 나의 꿈도 실현해줄 것이다.

매일마다 상대하는 많은 손님들 가운데 제일 상대하기 쉬운 것이 철부지들과 중년 남성들이였다. 이런 사람들은 깎아주면 깎아주는 대로 좋다 궂다 말이 없었다. 하여 나도 고마운 마음에서 보다 멋지게 깎아주려고 애를 쓴다.

제일 상대하기 어려운 것은 금방 중학교를 나섰거나 혹은 아직 중학교에서 공부하는 애들이었다. 완전히 세상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을 이해하는 마음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 한창 자기가 제일 정확하다고 날뛰는 때라 다듬어놓은 머리에 항상 의견이 있었다. 너무 짧게 깎았다는 것이 보편적인 의견이었다. 깎았는지 안 깎았는지 나도 모르겠는데 됐다고 툭툭 털고 일어난다. 조금 깎자면 힐끔 보고는 돈을 던져주고 사라진다. 염색을 해도 무조건 지금 머리색갈로 해달란다. 지금 색갈은 물에 씻기고 해빛에 바래여서 똑같게 될 수가 없다고 해도 아니란다. 무조건 같아야 한단다. 조금 진하게 해줄 터니 일주일후에 마음에 안 들면 다시 오라고 구슬려 보내기가 일수였다.

할머니들은 더욱 골치가 아팠다. 예전처럼 제일 눅은 걸로 해달라는 할머니는 거의 없다. 파마약도 비싼 걸로 좋은 걸로, 염색도 커피색이요 포도색이요 하면서 아는 것도 많았다. 자식들이 외지에서돈을 부쳐오니 호주머니가 묵직한 것이다.

한번은세 있는 할머니 한분이 찾아와 머리가 길어서덜미가 더우니 높게 쳐달라고 하셨다. 이젠 됐느냐고 물을 때마다 조금 더 조금 더 하셨다요구대로 나갔던 할머니가 잠시 후 갑자기 되돌아오더니 나이든 할망구가 이런 머리로 어떻게 돌아다니냐며 야단이셨다. 누가 뭐라고 한 것임이 틀림없었다. 제자로 있던 애가 요구대로인데요 하고 말했더니 "왜,인네라고 업수이 여기냐, 오랜 미용원이라고 찾아왔더니 속혔다."며 길길이 뛰셨다. 이러다간 다른 손님들 머리마저 지체될 것 같았다. 나는 제꺽 할머니를 자리에 주저앉히고 머리깎은 값을 되돌려주고 면비로 염색까지 해드리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대뜸 안색이 밝아지며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만 정 해주겠다면 하겠다며 주절주절 사설이 많으셨다. 참 웃지도 울지도 못할 할머니였다.

차츰 나이가 들고 젊은 애들이 주위에 미장원을 오픈함에 따라 나는 자신이 시세에 떨어짐을 느낄 수 있었다. 해오던 머리 스타일이니 젊은이들은 한번 오고 다시 안 오는 것이다.

2004 1, 나는 현금 만원을 지니고 홀몸으로 광주로 갔다. 아는 분의 소개로 유능한 미용, 미발사를 전문 배양하는 현대화한 미장원을 찾았고 두 달 동안 24가지 새로운 머리꾸미기, 6가지 새로운 파마기술을 익혔다.

미장원에서 새로운 머리스타일이 나갈 때마다 미장원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두 세 번만 오면 면목을 익히었고 우리 미발점에 다녀간 손님들이 다시와서 간단히 앞머리를 자르고 들뜬 머리를 드라이브하는 등등은 절대로 돈을 받지 않았다. 그런 약간의 혜택으로 다시 찾아오는 손님들도 많았다.

2008년까지 나는 지금 거느리고 있는 3명의 제자 외에도 수십 명의 제자들을 키워냈다.

허름한 판자집부터 사치한 미장원에 이르기까지, 한 명이었던 첫손님부터 지금 문턱이 다슬도록 드나드는 고객들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머리를 볶고 지지고 했던가. 억울해서, 분해서, 서러워서 눈물을 흘린 적은 얼마였던가! 그러나 그처럼 많은 육체상의 고달픔도, 정신상의 상처들도 고객들의 만족스러운 웃음 하나로 사라져버린다.

2009 9, 전야의 곡식들도 누렇게 무르익어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나는 38살 나이로 남편에게서 주책없다는 소리까지 들으며 둘째 애를 낳았다. 달덩이 같은 아들애였다. 내가 애를 낳던 , 현성으로 오가는 공공버스 안에서 누군가 미장원 각시가 아들을 낳았다오 했더니 거참 기쁜일이구만 하면서 모두들 제집 일처럼 기뻐하더란다. 모두들 기뻐한다는 점이 내가 남의 머리를 깎고 볶고 하는 가운데서 한 점의 부끄럼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지지고 볶으며 살아온 20 세월, 나는 참된 인생길을 걸어왔다고 자처한다. 충실하고 만족되고 그래서 행복한 인생길이었다.


 네, 이상은 "볶고 지진 20년 세월"이란 표제로 동녕현 이현숙씨가 보내온 생활수기였습니다. 좋은 글 보내주신 이현숙씨 감사합니다.

                 _______노    래______

 계속해 연수현 김춘식씨의 "민영교원의 아내"를 감상해 보겠습니다.


 전에 농촌학교마다에 민영교원들이 있었다. 농촌교육의 중임을 떠메고 학교 발전을 위해 땀동이를 쏟아온 민영교원들이었다.

        나 역시 30년 교원생애에서 장장 14년을 민영교원으로 일해 왔었다. 그러면서도 담임교원으로, 교도주임으로 열심히 일해왔고 나중에는 시골학교의 교장직까지 맡기도 했었다. 그러다 지난 1992년에 정식교원으로 신분이 변해서야 현성 중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전에 농촌학교의 민영교원 대우는 정식교원에 비해 너무나 낮았다. 분명히 같은 일을 하면서도 정식교원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노임을 받았고 그나마 외상놀음으로 연말이 돼야 받을 수 있었다. 그런 노임마저 일년씩 미뤄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민영교원은 허울뿐이고 가정생활이 대부분 어려웠다. 따라서 민영교원 아내들의 고생도 만만치 않았다.

        아내가 나에게 시집온 것은 1980년이었다. 그래도 민영교원에게 시집간다고 큰 희망을 품었었지만 정작 차례지는 것은 고생뿐이었다. 민영교원에게 시집온 보람으로 "사모님"으로 불리기는 해도 남들이 모르는 가난으로 시달려야 했다.

        내가 금방 결혼했을 때만 해도 촌에서는 민영교원의 노임으로 일년에 280원을 지불했다. 하루 노임을 1원으로 셈했지만 방학기간은 셈에 넣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아내는 적은 노임을 탓하지 않고 부지런히 생산대 노동에 종사했고 갖은 힘을 다해 가정을 유지했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고 호도거리 책임제가 실행되면서 우리가정은 곤경에 빠지기 시작했다. 누가 정한 정책인지 모르지만 민영교원가정에는 식량전도 주지않았기 때문이었다. 하도 억울해 아내가 촌지도부를 찾아 시비를 했지만 촌간부들은 우에 그런 정책이 있고 구체 실행권은 생산대에 있다며 모르쇠를 댔다. 까짓 허울뿐인 교원직을 훌훌 털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워낙 즐기는 일이라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우리가정에는 식량전으로 겨우 서무논이 차례졌다. 실로 일년 양식을 해결하기도 어려운 면적이었다. 대신 노임을 올려준다고 했는데 일년에 겨우 360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애가 병자랑을 하루건너 하는지라 병원출입이 잦았다. 손에 쥔 돈은 없고 돈 쓸 일은 많고 그래서 아내가 택한 것이 삯일이었다.

        봄철이면 아내는 집에 모내기가 끝나기 바쁘게 한족농가를 찾아다니며 삯모내기를 했다. 여름이면 하루에 5-6원씩 받으며 논김을 맷고 가을이면 삯가을을 하고 겨울이면 타작을 했다. 이런 삯일은 그런대로 현금을 벌 수 있어 바쁜 목을 에울 수 있었다.

        그러나 아내가 아무리 손발이 터지도록 일해도 가정 살림은 펴일 줄 몰랐다. 결혼 때 쓰고 살던 초가집이 낡을 만틈 낡은지라 집터 값 5백원만 받고 이사를 했는데 결국 천2백원이란 빚만 걸머지게 됐다. 고리대를 맡은지라 일년 이자만 해도 내 노임으로 메우기 어려웠다. 결국 우리는 이사 한번으로 꼬박 5년간 빚에 시달려야 했다.

        집을 산 후 아내는 더욱 악착스레 삯일을 했다. 나도 시간이 되는대로 아내 뒤를 따라다니며 일을 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체면 같은 걸 고려할 여지가 없었다. 후에 책임포전을 조절하면서 우리도 남과 같이 책임포전을 타고 내 노임도 한달에 70원으로 올랐지만 역시 살림이 펴이지 않았다. 촌 경제가 변변치 못해 연말이 돼도 내 노임을 타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내의 삯일은 끝이 없었다.

        삯일을 하던 가운데서도 가장 잊지 못할 것은 아마를 뽑던 일이었다. 여름방학도 다가는 어느날 아침이였다. 아침을 먹고 나서 대문 앞에 나와 서있는데 마침 한골목에 사는 한족친구가 자기 아내를 데리고 어디로 바삐 가는 것이었다. 어딜 그리 바삐 가냐고 물었더니 요즘 동네서 10여리 떨어진 농장에 아마 뽑으러 다닌다는 것이었다여직 아마 뽑는 것을 보지 못한 나는 호기심이 동해  일은 흠드냐 일당은 얼마나 주냐며 꼬치꼬치 캐어물었다. 그러자 그는 하루에 6~7원 벌이는 한다면서 일이 어지럽지만 대신 힘은 안 든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아직 방학인데 집에서 놀면 뭘하냐고 같이 가자고 권장했다.

        아내가 연며칠 앓고 있어 여기저기서 돈을  꾸어대던 나인지라 얼싸 좋다고 따라나섰다. 그런데 아마뽑는 일이 그렇게 힘들 줄이야! 쨍쨍  내리 쬐는 8월의 땡볕아래서 아마를 뽑노라면 목구멍에서불내가 나고 땀이 동이로 쏟아지는가 하면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써야 했다. 첫날이라 멋모르고 장갑도 안가지고 나는 맨손으로 아마를 뽑았는데 저녁때쯤 되여보니  여기저기 손바닥에 물집이 생겼다. 게다가 경험이 없는 탓으로 자꾸 딸려 올라와 그놈의 흙을 떨어버리는데도 숱한 품을 허비했다.

        그날 나는 종일 힘들게 일해 겨우 450전을 벌었다. 그날 너무도 혼난 나는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며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허나 정작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자 새 힘이 솟구치면서 떠나려고 서둘렀다 . 필경 평소의 하루수입보다 많은 , 그 것도 현금이니 말이다. 밤새 나의 신음소리를 들은 아내 말려 나섰지만 나는 한사코 나섰다. 대신 전날의 교훈을 살려 나이론 실로 장갑과 오이, 물같은 것을 넉넉히 준비해가지고 떠났다. 사전에 만단의 준비가 있은 데다 경험이 있어 이튿날은 전날보다 일찍 일을 끝내고도7원을 벌 수 있었다. .평소 이틀 로임보다 많았다.

        여기서 재미를 나는 사흩 날에도 나서는데 아직 몸이 완쾌되지 않은 아내도 따라나섰다. 내가 하루 이틀만 집에서 쉬면서 몸을 춰 세우라고 아무리 말려도 막무가내였다. 할 수 없이 나는 그날 안해를 데리고 아마뽑으러 갔는데 처녀 때부터 일이 몸에 배인 안해라 아마 뽑기도 나보다 나았다. 그날 우리는 20원을 벌었다.

        그후에도  우리는 매일 2~3십원씩 벌며 함께 닷새를 더 다녔으며 내가 개학해 출근하러 다닌 후에도 아내는 이웃들과 동반해 열흘을 더 다녔다. 이렇게 우리는 그해 여름에 아마 기로 4백 원을 벌었다 . 돈은 나의 몇 달 로임을 당했다. 그것도 현금을 손에 쥐였으니 우리로서는 수확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아마 뽑기 삯일은 3년간 지속됐다. 그러나 대가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해 여름방학에 우리 부부는 삯일을 나가면서 애를 집에 두고 갔다. 그런데 점심때가 지나자 갑자기 날씨가 변하면서 번개가 치고 벼락이 울면서 광풍폭우가 쏟아졌다. 그날 혼자 집에서 점심을 먹고 혼곤히 잠들었던 아이는 천둥소리에 놀라 깨여나서는 너무 놀라고 겁이 나서 부들부들 떨면서 울었는데 뢰성벽력에 이웃들도 애 울음소리를 듣지 못했다.

   비가 끊기  바쁘게 우리는 애가 걱정돼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까지도 애는 방구석에 옹크리고 앉아 부들부들 떨며 흐느끼고 있었다. 아이의 몸은 열이 불덩이가 되여 있었다. 얼마나 놀라고 혼났으면 정도로 되었으랴 싶어 아내 가슴이 아파 눈물을 뚝뚝 떨구며 소리 내어 울었다. 나도 가슴이 찢어지는듯 했다.

   아이를 안고 병원에 가니 의사는 그저 많이 놀라서 그렇다면서 주사를 맞고 나면 일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진정제를 한대 놓고  점적주사도 놔줬다.  얼마 안지나 열도 내리고 애의 정서도 회복되었다.  점적주사를 맞던 애가 갑자기 "팔보죽"이 먹고 싶다고 했다. 그말에 우리 부부는 그만 웃으을 터뜨리고 말았다. 생기를 찾은 애로 마음속 긴장이 활 풀렸던 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 안해는 아마 뽑으러 갈 때는 물론이고 논에 일하러 때도 애를 믿음직한 이웃에 맡기지 않으면 데리고 다녔다.

   책임포전을 새로 조절한 후 우리에게 차례진 책임포전은 8 무 가량 되였는데 학교에서 농망가를 때를 내놓고는 농사일을 아내 도맡다 싶이 하였다. 나는 새벽에 논물이나 보러 다닐 뿐이였다. 그래도 그는 언제 한번 제가 고생한다고 불평을 털어놓는 법이 없었다. 응당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나는 마땅히 교육사업에 열성을 쏟아야 하는 교원이었다. 민영교원의 아내 있는 14년간 아내 말 그대로 궂은 마른일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정식교원의 아내들은 물론 농민아내들보다도 험하고 많은 일을 하였다. 그래서 내 마음은 지금도 아프다.

   아내는 현성에 이사 왔어도 처음 몇 해는 계속 삯일을 했다. 비록 내가 정식교원으로 되였고 현성조선족중학교에서 사업하지만 로임은 여전히 농촌에 타야 했는데 그때 향진에서는 재정난으로 일년에 겨우 한 두 달 로임을 주나마나하는 때라  로임을 가지고는 살아가기가 여전히 힘들었다. 게다가 아내 직업이 없고 우리가 이사온 후 촌에서는 책임포전을 회수해버렸다. 우리 학교에는  나같은 처지에 있는 교원이 몇 분 있었는데 아내 사모님들과 한데 어울려 삯일을 찾아하군 하였다.

   오늘에 와서 돌이켜보면 옛말과 같은 그제날의 이야기다. 나는 지금도 출장길에 어디를 가다가 아마밭을 보거나 논에서 모를 꽂거나 가을하는인들을 보면 옛일이 새록새록 눈앞에 떠오르며 감개가 무량하다. 때론 그곳에서 일하는 아내 모습이 환영으로 나타난다.

   그때 나와  함께 학교에서  사업하던 민영교원들 중 지금까지 교직에 남아있는 사람은 누구도 없다. 너무도 낮은 대우에 하나둘  중도에 하차해버렸다, 어떤 이들은 연해도시로 나가 취직했고 어떤 이들은 로무로 출국했고 어떤 이들은 장사를 하고 있는데 다들 괜찮게 나아가고 있다. 우둔한 놈 잡는다고 나 혼자 꿈쩍않고 교직에 눌러있는데 그러다나니 자연히 가정살림은 펴이지 못하고 그 때문에 아내 고생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나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고 있다. 필경 사업은 나의 적성에 맞고 내가 좋아하는 사업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내 자식에게 미안할 뿐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나를 원망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내 가정, 내 식구들이 더욱 사랑스럽다.


        네, 이상은 연수현 김춘식씨의 수기 "민영교원의 아내"였습니다. 좋은 글 보내주신 김춘식씨 감사합니다.

                        ________노    래______

        짧은 글입니다. "행복은 가꾸어가는 마음의 나무입니다"


        나무가 자라기 위해서 매일 물과 햇빛이 필요하듯이 행복이 자라기 위해서는 아주 작은 일에도 감사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내가 가진 것이 없어 보이는 건 가진 게 없는 게 아니라 내 자신에게 만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는게 힘이 들 때면 내 건강함에 감사합니다. 아이들의 웃음을 행복으로 보고 아무 일도 없던 늘 그런 일상에도 감사합니다.

때론 뉴스에 나오는 일가족 교통사고에도 내 가슴을 쓸어내리며 행복을 훔쳐보곤 합니다.

        행복을 저금하면 이자가 붙습니다. 삶에 희망이 불어나는 겁니다. 지금 어려운건 훗날 커다란 행복의 그늘을 만들어 줄 것임을 믿습니다.

        사람과 부딪기며 살아가는 건 두려움이 아니라 행복의 자잘한 열매입니다. 썩은 열매는 스스로 떨어지고 탐스런 열매만이 살찌우게 됩니다. 행복하고 싶다면  지금 당장 마음의 밑바닥에서 시들어가는 행복을 꺼내고 키우셔요.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으려는 것 그것은 죄입니다. 누군가 나를 안타까운 맘으로 지켜보고 있다면 보여주셔요. 그게 행복의 시작이 됩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해야만 합니다. 내 존재의 가벼움은 처음부터 없는 겁니다. 사랑받고 있음을 잊었나 봅니다. 잠시 일상의 중독에서 벗어나 가을의 햇살과 만나보시죠. 

        세상은 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 같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유하기 위해서만 사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사는 모습이 다  다르듯 보는 눈도 달라져야 여러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한가지의 눈은 하나만 보게 됩니다. 가진 것은 언제든 잃을 수 있지만 내 행복은 지킬 수도 느낄 수 있습니다.

                     ________음      악_______

     좋은 이야기로, 좋은 글로 엮어지는 "우리 사는 세상", 오늘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지금까지 기획과 제작에 남석준, 진행에 ____었습니다. 안녕.